
'이쿠멘(育メン)'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아이를 키운다는 의미의 '이쿠(育)'와 영어 '멘(Men)'을 합친 일본식 신조어로, 적극적으로 육아에 참여하는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2010년대부터 일본 사회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이 현상은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 전통적인 동아시아 가족 구조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회적 지표가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의 이쿠멘 현상을 통해 동아시아 가족 구조의 변화 양상과 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쿠멘 현상의 등장 배경
일본 사회의 인구학적 위기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되는 국가 중 하나로, 2022년 기준 출산율이 1.3명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인구학적 위기는 정부 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장려하고 남성의 육아 참여를 독려하는 정책들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전통적 성역할의 한계
'샐러리맨(회사원)'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로 구성된 전통적 일본 가족 모델은 현대 사회의 경제적 현실과 점점 괴리되고 있습니다. 맞벌이 가정이 증가하면서, 가사와 육아를 여성에게만 전가하는 방식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가치관의 변화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는 '일과 생활의 균형(Work-Life Balance)'을 중시하는 가치관이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들은 부모 세대의 과도한 직장 중심 삶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쿠멘 현상의 주요 특징

정부 주도의 캠페인
2010년 일본 후생노동성은 공식적으로 '이쿠멘 프로젝트'를 출범시켰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남성의 육아휴직 사용을 장려하고, 기업들이 아버지 친화적인 정책을 도입하도록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업 문화의 변화
일부 선도적인 기업들은 남성 직원들에게 육아휴직을 의무화하거나, 단축 근무를 허용하는 등 가족 친화적 정책을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소프트뱅크나 유니클로와 같은 대기업들은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디어의 역할
일본 미디어는 '이쿠멘'을 새로운 남성상으로 적극 조명하며, 육아에 참여하는 남성 연예인들을 롤모델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TV 프로그램, 만화, 드라마 등을 통해 육아하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확산되었습니다.
동아시아 가족 구조의 변화 징후
일본의 이쿠멘 현상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관찰되는 가족 구조의 변화를 반영합니다.
유교적 가족 구조의 재구성
전통적으로 동아시아 가족은 유교적 가치관에 기반한 위계적 구조를 가졌습니다. 아버지는 생계부양자로, 어머니는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현대 사회에서 점차 변화하고 있습니다.
남성 정체성의 확장
'남성=생계부양자'라는 단일한 정체성에서 벗어나, 양육자로서의 정체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남성상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이쿠멘들은 육아를 하는 것이 남성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풍요롭게 만든다고 인식합니다.
맞벌이 가정의 증가
한국, 중국,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맞벌이 가정이 보편화되면서, 전통적 성역할에 대한 재고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경제적 필요성과 여성의 교육 수준 향상이 이러한 변화를 촉진하고 있습니다.
변화 속의 도전과 과제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
일본에서도 이쿠멘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정책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실제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은 2022년 기준 약 14%에 그치고 있습니다. 이는 기업 문화와 사회적 기대 사이의 괴리를 보여줍니다.
세대 간 인식 차이
중장년층에서는 여전히 전통적 성역할에 대한 기대가 강하게 남아있어, 젊은 부부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가정을 꾸려나가는 데 갈등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직장 문화의 변화 속도
'장시간 근무'와 '회사 중심'의 직장 문화는 여전히 많은 동아시아 기업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남성이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가 존재합니다.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
일본의 이쿠멘 현상은 유사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가진 한국 사회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정책적 접근의 중요성
한국 정부 역시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아빠 육아휴직 보너스제' 등 남성의 육아 참여를 장려하는 정책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효과를 위해서는 더 강력하고 포괄적인 정책 지원이 필요합니다.
기업 문화 개선의 필요성
한국 기업들도 가족 친화적 문화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제도만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남성 직원들이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중요합니다.
미디어의 역할
한국 미디어에서도 '슈퍼맨이 돌아왔다'와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육아하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긍정적 이미지의 지속적인 확산이 사회적 인식 변화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 가족의 미래

더 평등한 파트너십으로의 전환
동아시아 가족은 위계적 구조에서 점차 파트너십 기반의 관계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부부가 생계 부양과 가사, 육아를 함께 나누는 모델이 확산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다양한 가족 형태의 인정
핵가족, 한부모 가정, 맞벌이 가정 등 다양한 가족 형태가 공존하는 사회로 변화할 것입니다. 이에 따라 '정상 가족'에 대한 고정관념도 점차 완화될 전망입니다.
세대 간 돌봄의 재구성
고령화 사회에서 세대 간 돌봄의 형태도 변화하고 있습니다. 노인 돌봄에 대한 책임이 여성에게만 집중되던 방식에서 벗어나, 사회적 지원과 남녀 공동의 책임으로 재구성되고 있습니다.
마무리
일본의 이쿠멘 현상은 단순한 사회적 트렌드를 넘어,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동아시아 전통 가족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징후입니다. 급속한 경제 발전, 저출산, 고령화, 여성의 사회 진출 확대 등 공통된 사회적 도전에 직면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가족 구조를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가족 구성원들의 웰빙과 행복입니다. 아버지의 적극적인 육아 참여는 아이의 발달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부담을 줄이고 아버지 자신에게도 더 풍요로운 삶의 경험을 제공합니다. 일본의 이쿠멘들이 보여주는 변화의 물결이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어, 더 균형 잡히고 행복한 가족 문화가 형성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이 글은 일본 사회학 연구와 동아시아 가족 구조에 관한 학술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